여행길에 비를 만나면 참 하염없다.
비는 신비스런 마력을 지녔다. 잊고 산 옛 추억도 비에 젖어 움이 튼다. 그래서 비가 오면 비에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
빗방울이 뿌옇게 낀 주인도 없는 시골 작은 간이역 창가에 서서 유리창 위에 어떤 녀석의 이름을 썼다가 행여 누가 볼까 얼른 지운다. 사랑은 이렇게 빗방울 뿌옇게 낀 유리창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고 문질러서 지우는 것만큼이나 쉽고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빨간 함석지붕 처마 아래서 그 녀석과 함께 비를 긋던 어느 여름을 떠올리며, 골목길 모퉁이를 돌다 그 여름과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 가만히 뒤돌아 눈을 감는다.
아주 오래된, 길에 흘린 기억들이 빗물에 싹을 틔워 '나 여기 있어요' 손을 흔들며 곁에 다가와 말을 건다. 참 뜬금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