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블완 17

기도등대

신앙을 가진 이나, 신앙을 갖지 않는 누구나 기도를 한다. 종교, 종파에 따라 기도 형식이나 내용 등은 다르지만 기도가 늘 강조되기는 마찬가지다. 기도란 내 안으로 눈 돌리는 것이다. 기도는 손이 하는 것이다. 머리로 하는 기도는 대부분이 욕망의 기도이다. 거지가 푼돈 구걸하듯 하지 말고, 내 욕심을 내려놓고 맑은 정신 밝은 눈으로 경건하게 하되, 함에 함이 없고, 봐도 봄이 없고, 들어도 들음이 없는 일념으로 하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합장하는 것은 이런 뜻이 있다 한다. “나는 가슴 전체로 당신에게 인사드립니다. 이쪽저쪽으로 분열된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내 양손 모두를 합쳐서 내 모든 것을 합쳐서 그대에게 경배 올립니다. 아무것도 뒷전에 감춘 것 없이 그대를..

여행 이야기 2024.11.27

11월을 보내며

11월이 가을을 놓아버린 걸까.갑자기 찬바람이 불며 급변하는 날씨가 요술을 부린다. 몸은 오들거리지만 다양한 빛깔에 그리고 공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미세한 하늘의 매력에 빠져든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오래도록 담아두고 싶다.바람에 낮게 뉜 풀밭 가운데 눈높이를 맞춰 앉아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소리, 온도, 바람에서 느껴지는 촉감을 우선 기억한다.어느새두꺼운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안개비가 방울방울 손등으로 떨어진다 이제 떠날 시간이야. 얼른 핸드폰을 꺼내 순간을 담는다.행여, 잊힐까 갈피에 끼워져, 접힐, 11월

여행 이야기 2024.11.26

지리산 용호정

.지리산 구룡계곡에도 늦가을 정취가 그득하다.옛날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군데 소에서 노닐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구룡계곡. 육모정에서 구룡폭포까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과 불타는 단풍은 지리산 계곡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세월을 안고 기억을 품은 공간, 멋과 풍류의 옛 선비를 만나려 구룡계곡 용호정 앞에 선다.한 줌의 바람과 흐르는 물에 술잔을 실어,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 세상을 살아갔던, 가을 하늘처럼 맑고 투명한 조선의 선비들. 옛 선비들은 깊은 산속 경치 좋은 곳에 집이나 정자를 지어 그 자연을 삶의 공간으로 끌어드렸다. 자연은 선비들이 공부하고 깨닫는 곳이자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이다. 그 안에 고요히 앉아 자연을 바라보며 더러는..

여행 이야기 2024.11.25

은목서꽃

아침 베란다 창문을 열었더니, 찬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상큼하고 달콤한 향기가 안겨 왔다. 내로라하는 화분들 틈에, 9층 높은 곳에서 그도 화분에 담겨 꽃을 피울까 하면서도. 너는 왜 꽃 필 줄도 모르니, 구박받던 은목서가 가을의 문을 닫는 小雪에야 꽃을 피웠다. 작고 귀여운 하얀 꽃망울을 달고 배시시 눈웃음 짓는다. 달콤하고, 상큼하고, 고혹적인 향에 취해, 고맙다,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내가 보고 싶다 해도, 나를 위해 꽃을 피워주지 않더라.화초를 가꾸는 것은 시간을 인식하는 동시에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적막을, 시간이 지니는 고요를, 시간 속에 배인 침묵을 배우는 일이다.  청아하고 감미로운 목서향은 나를 부르기도 하고 나에게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얀 꽃망울이 톡 톡..

여행 이야기 2024.11.23

등대 이야기

(금오도 해안의 노란색 등대) 푸른바다 한복판 불룩한 바위 위를 노란등대가 지키고 있다. 지금은 햇빛을 받아 제 모습을 알리지만, 누군가를 비춤으로써 등대는 스스로 빛이 날 것이다. 사람도 역시 누구의 빛을 받아 빛나는 것보다 누군가를 비춤으로써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등대 같은 사람은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거나 희망과 위안을 주는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등대는 어두운 밤바다에서 배들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대부분 등대의 역할이 바다를 비춰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실 등대는 ‘나 여기 있다!’라고 항로를 지나는 배에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길만..

여행 이야기 2024.11.21

안개

안개가 내리는 가을 아침소리 없이 밀려드는 안개흑백영화같이 아득하고 고요한 안개 속이었다가 어느덧 햇살이 비치면 마치 시간이 부리는 마법같이 하나씩 펼쳐지는 꿈같은 풍경들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변화를 아침 안개의 상태를 신호로 삼는다 밤을 건너온 자욱한 안개 속으로 힘없는 햇살이 스며들어 천천히 꺠어나는 아침은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을 품고 있다햇살이 눈물처럼 뿌려진 습기를 핥아낸다낙엽의 아침은 그래서 늦게 온다또 잎은 진다보일 듯 말 듯 열린 강가를 따라 안개 너머의 세상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한다

여행 이야기 2024.11.20

적멸로 가는 길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 난만(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화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眞朱紅)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정비석의 '산정무한' 중 지리산 뱀사골 계곡, 10Km 단풍에 취해 발목이 시큰하도록 걷고 또 걷습니다. 적멸(寂滅)로 가는 길이 어찌 이토록 환하고 아름다운지요.낙엽을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울고, ‘사드락 사드락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더니 그렇습니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은,  누구라도 산천을 헤매게 할 정도로 황홀합니다.  “한 장의 지폐보다..

여행 이야기 2024.11.19

사랑이란

사랑은 기다리는 것., 그가 내게 올 때까지 변치 않고 기다리는 것.사랑은 다가서는 것, 그가 떠나기 전에 그에게 다가서는 것.사랑은 넓어지는 것, 그가 내게 들어와 나의 끝을 볼 수 없도록 넓어지는 것. 사랑은 작아지는 것, 내가 그에게 들어가도 그가 나를 느낄 수 없도록 작아지는 것이다. 그래 사랑은 밝아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사랑은 그냥 사랑이라는 말 하나뿐.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받는 사람도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땅이고 하늘이고 바다이고 내가 사는 세상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맛이 사라질 때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그래서 사랑 안에서 모든 존재를 아름답게 태어나게 한다. 인생이란 결국 사랑하다가 떠나는 존재이다.

여행 이야기 2024.11.18

검은 유혹

유혹은 위험하고 달콤하다빠져들고 싶은 아득한 그 맛, 그 유혹하는 검은 비색튀르키예의 속담에  '커피는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라고 했다 늦가을 아침나절,  버스승강장에서 향긋한 커피향을 맡으며 맑고 검은색의 원두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따뜻함을 느끼고 있다. 커피잔을 감싼 차가운 두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에 소박한 기쁨이  피어오른다.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는 따뜻함을 오래 머금으려는 듯 지긋이 입을 다문다. 늘 마시지만, 난 카페라떼와 카푸치느를 구분하지 못한다두 커피의 차이는 우유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한다커피라떼는 카푸치노 보다 단 맛을 강조하고, 카푸치노는 카페라떼 보다 고소한 맛을 강조한다지만그 맛이 그맛인것 같아  이젠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하고  주문한다. ..

여행 이야기 2024.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