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봄, 들길을 걸으며

까치놀 2017. 4. 25. 21:52

 

 

, 들길을 걸으며

 

 

임 인택

봄이라는 말이 참 좋다. 왠지 길게 발음해야 할 것 같은 이 짧은 단어 속에는 절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무엇인가가 담겨있다..

봄비, 봄맞이, 봄바람, 봄나물, 봄처녀, 봄소풍, 봄날, 봄밤, 봄동산, 봄바다···· 어떤 말에 붙여도 어색하지 않고 어떤 것에 붙여도 기분이 좋아지는 봄. 봄에는 생명의 향기가 난다.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는 설렘의 향기가 난다. 옛 사랑처럼 아련한 그리움의 향기가 난다. 봄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봄은 보는 것이며, 시작함이다. 시에서 살짝 숨을 죽이다 작에 힘을 주면 왠지 불끈 주먹이 쥐어진다.

남도의 봄은 서둘러 찾아온다. 아직도 아침에는 찬바람에 손이 시리지만, 한층 따뜻해진 3월의 봄볕 속에 거리의 꽃집에는 이미 색색의 옷을 갈아입은 봄꽃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봄볕 고인 따뜻한 들판을 걷는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밟히는 작은 돌들의 사각거림이 발길을 즐겁게 한다. 부드러운 들길이 가벼움을 더해준다. 회색빛 풀더미 속에서 초록이 얼굴을 내민다. 겨울을 이겨낸 초록, 초록의 싹이 트는 순간에 연함은 존재한다. 봄의 생명력이 아니면 어떻게 저 여린 연함이 단단함을 이겨내겠는가. 싹은 단단함으로 자신을 가두기보다는 성장하기를 바란다. 지난겨울, 발에 치인 메마름에서 초록의 풀내음이 그리웠는데, 가볍게 봄내음을 맡는다. 그 냄새를 맡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진다.

들길가로 어린 아이의 밝은 웃음 같은 노랑, 하양, 보랏빛 꽃들을 본다. 봄이 열리기 시작하는, 봄을 여는 꽃들. 그 여린 꽃잎을 만지기 위해 쭈그리고 앉는다. 삐죽 고개를 내민 하얀 개냉이꽃, 보랏빛 광대나물, 앙증맞은 봄까치꽃. 이 녀석은 코딱지 풀이라 불리는 예쁜 꽃다지 아닌가. 붓꽃, 아기별꽃, 괭이눈, 노루귀, 지치, 바람꽃, 패랭이부를수록 입에서 감칠맛 도는 아름다운 우리말, 예쁜 들꽃들. 곱다. 꽃은 그렇게 곱다. 마치 이른 새벽 송알송알 열린 이슬방울처럼 한군데 무리지어 존재감을 나타낸다. 하나씩 제 이름 불러주자 지나는 바람에 꽃잎을 살랑이며 고마움에 답한다. 사랑은 이름 불러 주는 것이라더니,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내게로 와서 꽃이 되어 준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가 보다. 꽃이 피어 봄이 오는 건지,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건지. 이 세상에 꽃이 없었다면, 봄날이 없었다면, 따뜻함이 없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생각해 본다. 봄에 만나는 초록빛은 언제나 따뜻하다. 자그막한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룬다

새로운 계절, 봄의 시간으로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가는 길. 좋다. 마냥 걷고 싶은 봄날이다. 넓은 들판이 새 옷을 갈아입고 있다. 무거운 잿빛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하늘하늘 고운색의 시폰(chiffon) 원피스를 차려입은 산천에서는 화사한 봄의 살 냄새가 난다. 그렇게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왔다.

도랑물 소리가 여물다. 물결 따라 흐르는 구름을 잡으려 송사리 무리가 빠르게 움직인다. 문득 조용미 시인의 강으로 나간 사람시구가 생각난다. “바람 부는 네 시를 모르고 강가로 가는 사람은 /바람 많은 다섯 시를 가지게 되고”. 그렇게 기다리게 해놓고 오지 않는 그 사람 때문에 허전한 걸음걸이는 아무 일 모르고 가만히 피어 있던 아그배꽃을 보게 된다고 했던가.

하얀 아그배꽃, 하얀 바람, 하얀 강물의 쓸쓸함이 머물던 그 강은 어디쯤일까? 연한 봄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벼운 바람이 머리를 스친다. 눈썹이 날아오르는 구름처럼 가볍다. 신선한 바람은 얼굴에 머물다 머리를 씻어주고는 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봄날의 기분 좋은 차가움은 머물러있지 않고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상쾌하다.

도랑가 수양버들의 차르르 떨어지는 연초록 가지 사이로 봄바람이 흐른다. 긴 머리를 말리는 여인네의 정갈한 머리카락처럼 부드럽게 한 올 한 올 떨어지는 가벼운 연초록. 햇빛을 머금은 순수한 밝음은 가벼운 깃털이 되어 허공을 떠가는 마음을 만든다.

건너편 밭두렁에 서있는 산수유나무의 여린 가지마다 움켜쥐고 있는 노란 햇살이 눈부시다. 다 피어도 덜 핀 듯, 덜 피어도 다 핀 듯. 산수유의 그 도드라지지 않은 모습이 보기 좋다. 밝은 노랑은 곧장 달려 나갈 듯한 빛을 낸다. 노란 꽃에 코를 대고 숨을 마시면 몸에 노랑 물들어 샛노란 봄을 만들어 준다.

숨은 가쁘지만 눈은 즐겁고 발걸음에 신명이 난다. 봄은 보는 것마다 노래 아닌 것이 없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저만치 봄이 보인다. 어디선가 이브 브레너(1951~ 이태리 소프라노 가수)가 스캣으로 노래한 강가의 아침이 아득히 밀물져 들려온다. 봄 풍경들 속에 이미 노래가 깃들어 있다가 잠시 스쳐가는 바람이며 햇살을 타고 슬며시 빠져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음악 이전의 음악, 소리 이전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어디 구멍가게에 앉아 막걸리 한 잔에 목을 축이고 싶지만 그런 집도, 내 노래를 들어 줄 사람도 없어 아쉽다.

누군에겐가 이 흥겨운 새 봄을 전한다. 또한 새 시작을 응원한다. 움츠렸던 그대의 가슴에도 따뜻한 새싹이 움트기를 기원한다. 그대와 내가 있어 오늘도 봄이다. 우리 모두 언제라도 꽃 웃음 피어나는 봄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키 큰 나무들의 가지 끝에 물이 오르는지 멀리서도 붉은 기가 돈다. 그 봄 참 곱게 피어난다.

()

(2017. 1. 21. 광주매일신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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