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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구룡계곡에도 늦가을 정취가 그득하다.
옛날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군데 소에서 노닐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구룡계곡.
육모정에서 구룡폭포까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과 불타는 단풍은 지리산 계곡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세월을 안고 기억을 품은 공간, 멋과 풍류의 옛 선비를 만나려 구룡계곡 용호정 앞에 선다.
한 줌의 바람과 흐르는 물에 술잔을 실어,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 세상을 살아갔던,
가을 하늘처럼 맑고 투명한 조선의 선비들.
옛 선비들은 깊은 산속 경치 좋은 곳에 집이나 정자를 지어 그 자연을 삶의 공간으로 끌어드렸다.
자연은 선비들이 공부하고 깨닫는 곳이자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이다.
그 안에 고요히 앉아 자연을 바라보며 더러는 독서를 하고 시문을 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소박한 일상이었다.
시간은 정말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어지고 포개지는 모양이다.
계곡 곳곳에는 옛 선비들의 체취가 남아 있다.
시간의 쪽문을 열고 미지의 세계로 그들을 따라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오염되지 않은 도원(桃園)의 세계로,
그 안에서 옛 분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며, 선비처럼 자연을 관조하고 깨닫고 즐기며 내 삶을 마감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