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바람 꽃 억새의 노래

까치놀 2024. 11. 13. 20:55

 

늦가을 억새는 볼 때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다. 빛나는 갈가마다 그리움들이 묻어나고, 하늘 향해 흔드는 야윈 손이 애처롭다.

억새는 바람의 꽃이다. 억새가 가진 것은 제 몸뚱이와 바람뿐이다. 그래서 억새꽃은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이 혼백 안에 가을빛이 모여서 반짝거린다. 작은 꽃씨 하나하나가 가을빛을 품고 있다. 억새들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보면 실로 처연하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차마 울 수가 없어 희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 같기도 하다.억새들이 서로 몸을 비빌 때마다 솨아아 쏴아아 해조음이 들리는 듯하다. 마치 억새들이, 아니 이 커다란 산이 낮게 낮게 소리 죽여 우는 소리도 같다.

 

쳐다보는 속눈썹에 파란하늘 물이 드는지 눈이 따갑다.  손으로 만져지는 가을, 어디를 둘러보아도 가을이다. 몇 마디 가을 노래 흥얼거리다, 괜히 누군가를 불러본다. 거기 누구 없냐고.

 

가을 억새밭에 서본 사람은 안다. 아름다운 사랑도 때가 되면 저문다는 것을. 지금 아름다운 것들도 언젠가는 푸석푸석한 잡초가 된다는 것을. 우리들의 느낌 그리고 말과 행동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다. 오늘 내가 억새를 보며 느낀 감동과 그리움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다.

 

가을 억새는 날마다 조금씩 말라가면서 꽃씨를 바람에 띄워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억새는 새움이 돋아나고 피어나는 순간도 아름답지만, 그 절정은 바로 겨울바람이 불어오기 전, 여행을 앞둔 순례자의 부푼 꿈을 안고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있는 지금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꽃씨들을 모두 날려 보내고 나면 억새는 땅에 쓰러지고, 그러면 가을도 다 갈 것이다.